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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on light's blog

낭만과 열정의 제국 | 🇫🇷 프랑스편 | 🎵 14화 | 륄리, 지휘봉으로 자기 발을 찍고 죽은 음악가 본문

ℰ𝓾𝓻𝓸𝓹/낭만과 열정의 제국: 프랑스편

낭만과 열정의 제국 | 🇫🇷 프랑스편 | 🎵 14화 | 륄리, 지휘봉으로 자기 발을 찍고 죽은 음악가

raonmemory 2026. 5.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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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 파리 성당 내부에서 지휘자가 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대규모 합창단과 악단을 지휘하는 장면

1687년 1월 8일, 파리 생 트니 드 라 샤펠 성당에 음악이 울렸습니다.

루이 14세의 병 회복을 축하하는 테 데움이었습니다. 왕이 항문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감사 예배가 열렸습니다. 파리 최대 규모는 이 성당에서였습니다. 지휘자가 단상에 섰습니다. 장바티스트 륄리였습니다. 오십네 살이었습니다. 프랑스 음악의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연주가 시작됐습니다. 륄리가 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습니다. 당시 지휘 방식이었습니다. 박자를 맞추기 위해 바닥을 쳤습니다.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륄리가 지팡이를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지팡이 끝이 자신의 발가락을 찍었습니다.

통증이 왔습니다. 그러나 연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륄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왕의 회복을 축하하는 음악이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상처는 처음에 작아 보였습니다.

발가락 하나였습니다. 피가 났지만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륄리는 다음 날도 일했습니다. 그다음 날도 일했습니다.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왕실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 오페라 작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감염됐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발이 부어올랐습니다. 의사가 왔습니다. 상태를 봤습니다.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륄리는 거부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무용수였습니다. 열네 살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파리로 왔을 때 처음 한 일이 춤이었습니다. 루이 14세의 궁정 발레에서 함께 춤을 췄습니다. 그 시절이 그의 출발이었습니다. 발가락을 잃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잃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미 오십 대였지만 거부했습니다.

감염이 번졌습니다. 발에서 다리로 올라왔습니다. 괴저였습니다. 의사가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륄리는 또 거부했습니다.

그는 온전한 몸으로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노음악가의 실루엣이 창가의 희미한 빛을 향하고 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악보와 지휘봉

죽음이 가까워오면서 륄리는 종교에 매달렸습니다.

파리의 고해 신부를 불렀습니다. 고해 성사를 받았습니다. 신부가 조건을 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업 중이던 오페라 악보를 불태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륄리는 악보를 불태웠습니다. 마지막 작품이 될 뻔한 오페라였습니다. 제목은 아르미드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구 한 명이 그 전에 악보를 몰래 베껴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본으로 아르미드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파리에서 오래 떠돌았습니다.

신부가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는 방문이 거부됐습니다. 한 귀족이 말했습니다. 이미 고해를 받았으니 성사는 끝났다고. 신부는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기록에는 다르게 나옵니다. 륄리가 마지막 순간 후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보를 불태운 것을 후회했는지, 인생 전체를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687년 3월 22일, 장바티스트 륄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발가락 하나의 상처가 시작이었습니다.

지휘봉이 자신을 향했을 때 이미 끝이 시작됐습니다.


륄리가 남긴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음악의 구조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오페라 형식을 정립했습니다. 프랑스 서곡의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느린 도입부와 빠른 전개부의 구조. 이것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따라했습니다. 헨델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흐도 그 구조를 차용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그는 음악가이기 이전에 권력자였습니다. 루이 14세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프랑스 음악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자신의 허락 없이는 파리에서 오페라를 공연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경쟁자들을 몰아냈습니다.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그의 밑에서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샤르팡티에는 그 대표적인 피해자였습니다.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륄리가 살아있는 동안 파리 오페라 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륄리가 죽고 나서야 그의 작품들이 공연됐습니다.

천재 하나가 다른 천재를 평생 억눌렀습니다.


륄리가 죽은 뒤 루이 14세는 새 음악감독을 임명했습니다.

한 달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유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레베유가 울렸습니다. 무도회 음악이 흘렀습니다. 새 작곡가가 왕의 취향에 맞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 파리에 와서 프랑스 음악의 정점에 섰다가 지휘봉 하나로 쓰러진 이야기. 파리는 그것을 잠시 이야깃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잊었습니다.

지금 륄리의 이름은 음악사 책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 군림했던 방식, 경쟁자들을 짓밟은 방식은 잘 언급되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로만 기억됩니다.

그의 무덤은 파리 생 에스타슈 성당에 있습니다. 화려한 대리석 조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죽은 뒤에 받은 영예였습니다.

낭만과 열정의 제국에서 가장 화려했던 음악가는 자신의 지휘봉에 쓰러졌습니다. 권력도, 재능도, 왕의 총애도 그 끝을 막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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