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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on light's blog

7화. 셀고리즘은 나를 보여주는가, 나를 설계하는가 본문

𝓔𝓬𝓸𝓷𝓸𝓶𝔂 𝓪𝓷𝓭 𝓛𝓲𝓯𝓮𝓽𝓻𝓮𝓷/10.🧩시대의 조각들

7화. 셀고리즘은 나를 보여주는가, 나를 설계하는가

raonmemory 2025. 6. 1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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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각자 폰 보는 커플.

내 피드는 나를 닮았을까

오랜만에 다른 사람 옆에서 함께 소셜미디어 피드를 넘겨 본 적이 있습니다. 같은 앱인데도 화면에 뜨는 내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 피드에는 요리와 인테리어가, 상대의 피드에는 운동과 여행이 가득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각자의 피드는 각자를 꽤 정확히 닮아 있었습니다. 마치 서로 다른 거울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피드가 나를 닮은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이 피드를 닮아 가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관심사에 맞추어 정교하게 짜인 화면을 흔히 셀고리즘이라 부릅니다. 이 말에는 화면이 나를 보여 준다는 뜻과 화면이 나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나를 정확히 아는 화면

셀고리즘이 놀라운 것은 그 정확함 때문입니다. 몇 초 머문 게시물, 우연히 누른 좋아요 하나까지 기록되어, 화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정확히 짚어 냅니다. 이 정확함 덕분에 우리는 관심 없는 정보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화면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 화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연히 추천된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관심사를 알게 되고, 그 관심사가 실제 삶의 일부로 자리 잡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셀고리즘은 자기 이해를 돕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추천된 공예 영상을 보다가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알고리즘이 단순히 소비를 유도하는 장치를 넘어, 삶의 폭을 넓혀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보여 주는 화면이 만들어 가는 나

그런데 이 화면은 단순히 나를 비추는 거울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주 보여지는 것에 반응하다 보면, 그 반응 자체가 다시 화면을 더 좁고 정교하게 만듭니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 처음에는 넓었던 관심사가 점점 몇 가지 주제로 좁아지고, 그 좁아진 화면이 곧 나의 관심사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 화면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감각에도 영향을 줍니다. 매일 보는 콘텐츠의 결이 특정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그 방향이 곧 나의 정체성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실제로는 다양한 면을 가진 사람인데, 화면이 보여 주는 좁은 모습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화면이 나를 바꾸고 있다는 느낌보다, 화면이 나를 점점 더 잘 알아 간다는 느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이런 화면을 오래 접한 세대에게는 이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아직 형성되어 가는 시기에 좁은 화면 속 모습을 자신의 전부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낯선 거리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남자

설계된 자아와 진짜 자아의 거리

이 지점에서 셀고리즘이 보여 주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거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특정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정교하게 그려지지만, 화면 밖의 삶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입니다. 문제는 화면 속의 좁은 나에 익숙해질수록, 화면 밖의 다면적인 나를 표현하고 발견할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이 거리를 좁히려면 의식적으로 화면 밖의 경험을 늘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평소 관심 없던 분야의 책을 읽거나,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을 만한 낯선 활동을 시도해 보는 것은 화면이 그려 놓은 좁은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화면 밖에서 나누는 대화도 좋은 계기가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알고리즘이 알지 못하는, 혹은 알고리즘이 미처 담지 못한 나의 다른 면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화면을 도구로 다루는 법

셀고리즘을 완전히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화면은 여전히 유용한 정보와 즐거움을 제공하는 도구입니다. 다만 이 화면이 나를 보여 주는 것을 넘어 나를 규정하기 시작할 때는 한 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검색 기록을 초기화하거나, 평소와 다른 주제를 일부러 찾아보는 것은 화면의 틀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화면 속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화면이 보여 주는 나는 나의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되새기는 데는 화면을 끄고 보내는 시간이 특히 도움이 됩니다. 화면이 없는 동안 스스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관찰해 보면, 알고리즘이 짐작조차 못 할 나의 모습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넘겨 본 피드

그날 이후 일부러 평소와 다른 주제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며칠 지나자 피드에 낯선 콘텐츠들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낯섦이 반가웠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관심사 하나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화면이 다시 조금 넓어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질문은 여기에 남습니다. 내 화면 속의 나는 진짜 나를 얼마나 닮아 있을까요. 그리고 그 화면이 보여 주지 않는 나의 모습들을 잊지 않으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화면 밖으로 나가 보아야 할까요.

오늘 저녁에는 폰을 내려놓고, 화면이 알지 못하는 나의 하루를 살아 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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