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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on light's blog

18화. 소소한 취미는 창작인가, 도피인가 본문

𝓔𝓬𝓸𝓷𝓸𝓶𝔂 𝓪𝓷𝓭 𝓛𝓲𝓯𝓮𝓽𝓻𝓮𝓷/10.🧩시대의 조각들

18화. 소소한 취미는 창작인가, 도피인가

raonmemory 2025. 9. 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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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창가 소파에 앉아 뜨개질하는 손.

퇴근 후 뜨개질을 시작한 이유

퇴근하고 집에 오면 뜨개질을 합니다. 특별한 목적은 없습니다. 그냥 실이 바늘에 감기는 반복적인 움직임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줍니다. 완성한 목도리와 모자는 몇 개 되지도 않지만, 그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서 좋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거 하면 뭐가 남냐고. 그 질문에 딱히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취미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창작일까요, 아니면 그냥 하루를 잊기 위한 도피일까요.

소소한 취미를 대하는 시선에는 늘 이 두 갈래가 함께 있습니다. 생산적인 활동으로 보는 시선과, 그저 현실을 피하는 방법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창작이라 부르기엔 작아 보이는 것들

창작이라는 말은 흔히 거창한 결과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시할 만한 작품, 판매할 수 있는 상품, 남들에게 보여 줄 만한 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뜨개질로 만든 목도리 몇 개는 창작이라 부르기엔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소한 취미를 창작이라 부르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창작의 본질은 결과물의 크기가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에 있습니다. 실 한 가닥이 손끝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느끼는 몰입과 성취감은 그 결과물이 얼마나 대단한지와 무관하게 진짜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소소한 취미도 충분히 창작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름 없는 사람들이 만든 소박한 물건들이 훗날 그 시대를 보여 주는 귀한 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생활의 일부였던 바느질이나 조각들이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창작의 가치는 만들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드러나기도 합니다.

 

도피처럼 보이는 순간들

동시에 이런 취미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잊기 위해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그 순간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취미는 회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회피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그 순간에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회복시키고, 그 회복이 다시 어려움을 마주할 힘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도피가 회복이 아니라 문제를 계속 미루기만 하는 방식으로 쓰일 때입니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은 편안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여전히 같은 어려움이 그대로 남아 있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취미 뒤로 숨기만 한다면, 그 취미는 회복의 도구가 아니라 문제를 외면하는 창구가 됩니다.

이 차이를 알아차리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그 순간에는 똑같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그 활동이 끝난 뒤, 현실을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드러납니다.

거울 속 뜨개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남자.

창작과 도피를 가르는 기준

창작과 도피를 가르는 것은 활동 자체가 아니라 그 활동이 남기는 것입니다. 취미를 즐기고 난 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다시 일상을 마주할 힘이 생긴다면, 그 취미는 창작이자 회복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취미를 하는 동안만 편안하고, 끝나고 나면 오히려 더 지치고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 취미는 문제를 미루는 도피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스스로의 취미를 가끔 점검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완성된 결과물의 개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시간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남기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주변에 좋아하는 것을 오래 지속해 온 사람들을 보면, 대개 그 활동을 마친 뒤 홀가분한 표정을 짓습니다. 반대로 무언가에 쫓기듯 매달리는 사람은 그 활동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존중하기

소소한 취미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그것을 대단한 일로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뜨개질로 뭔가를 팔거나 전시하지 않아도, 그 시간이 나에게 준 평온함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활동이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면, 소소한 취미는 그 자체로 존중받을 자격을 얻습니다.

친구의 질문에 다시 답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걸 하면 딱히 남는 것은 없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완성된 모자를 써 보며

완성한 모자를 써 보니 삐뚤빼뚤한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그 삐뚤빼뚤함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이 모자가 먼저 알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모자를 만드는 동안의 시간이 저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는, 모자의 완성도와는 상관없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질문은 여기에 남습니다. 내가 즐기는 이 소소한 활동은 나를 채워 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를 잠시 숨겨 주고 있을 뿐일까요. 그리고 그 답을 아는 것이, 이 시간을 더 온전히 누리게 해 주지 않을까요.

오늘 저녁에도 실 한 뭉치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번엔 무엇을 만들지보다, 이 시간이 끝난 뒤 내 마음이 어떨지를 더 궁금해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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